성산동에 위치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그 당시 아직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떨리는 목소리의 외침과 부정하는 일본의 입장에 안타까워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입장 바꾸어 생각해보기’... 5월 11일 이 곳을 다시 한번 찾아 갔습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한번 이 공간을 바라 볼까 고민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인들이 너무나 한탄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한번 전범자들이 보고 느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전범자들이 이 곳을 와서 느끼면서 당시 할머니들이 겪었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일본 전범군’의 입장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어린 사과 조차 받지 못하는 할머니들에게 제가 대신 사과드리고 싶은 작은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꽃 다운 나이 활짝 펼치기도 전에 씼을 수 없는 아픔을,
도대체 저 따위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소...
벽돌 사이 드리우는 빛이 저에게 꼭 말하는 것 같소.
혹시 그대들인가요...”
- 본문 내용 중 -
Location 서울 마포구 성산동 39-13
Since 2012
Architect 전숙희(와이즈 건축)
Area 건축면적(143.8 m^2), 대지면적(348 m^2)
1. 짧은 여행의 시작
매주 금요일마다 가까운 곳이라도 답사는 가야겠다고 정했고, 오늘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가기로 했습니다. 아침 8시 샤워를 끝마치고 노트하나와 펜 그리고 가방을 챙겨 문 밖을 나섰습니다. 내려야 할 지하철역은 망원역. 13시 부터 개관하는 박물관을 가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였습니다. 저는 아침 9시 30분에 망원역에 내려서 앤트러사이트 서교점을 먼저 향했습니다. 음악 소리 하나 없는 이곳엔 바리스타의 손짓 하나하나에 눈이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뜻한 라떼와 함께 박물관을 가기에 앞서, ‘위안부’할머니에 관한 자료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자료조사를 하던 중 불현듯 중학교 시절 ‘위안부’할머니들의 집회인 수요집회에 선생님과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동안 저는 과연 무엇을 했고, 관심 마저도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만큼은 과제 이상을 넘어 앞으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관심가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그 곳에서 많은것을 느껴오리라 다짐했습니다. 12시가 다되어갔을 때 저는 가까운 스시집에서 지라시스시를 먹었습니다. 오늘 만큼은 일본인이다... 생각을 하고 말입니다. 다 먹고 저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오픈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이곳을 도착하기 전 차 한대 정도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걷다보면 검은 벽돌로 된 박물관이, 굳이 말하려 하지 않아도 깊은 곳에 슬픔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길쪽에 따라 담장엔 다녀간 사람들의 작은 소망과 얘기를 노란 나비모양으로 된 종이에 적혀 있습니다.
앞쪽엔 이전에 차고로 쓰였던 큰 문이 보이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건물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엔 수평으로 돌출된 벽돌면이 있고 그 면 사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저는 무거워 보이는 슬라이딩 철문을 열고 위안부 할머니가 겪었던 심정을 일본군 전범가의 입장으로 느껴보고자 합니다.
2. 전범가의 입장으로 공간보기
이 곳은 매주 티켓에 그려진 할머니가 바뀐다고 한다. 혹시나 내가 실수한 분은 아니겠지 하고 티켓을 보았다. 모르겠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할머니의 얼굴이 있고 ‘박영심’이라는 이분의 이름이 보인다. 박영심...박영심... 그녀의 이름을 읽었을 때, 마음 한켠이 찡했다. 이 분들도 이름이 있었지. 한명의 소중한 딸이였을 것이고 누군가의 자매였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2-1. 어디로 갈지 몰라
어둡고 빛 한줄기 안들어오는 이 곳에서, 귓속으로 들리는 오디오 가이드에 따라 시작한다. 밖에서도 보았던 나비가 벽돌속을 뚫고나오는 영상을 보고, 다음 전시실을 향해 나는 문을 열고 나가본다. 다시 바깥이다. 하지만 바닥에서 소리가 난다. 밑을 내려다보니 거친 자갈길이 있고 내가 전쟁속에 있었을 때의 포화소리와 무거운 군화소리가 들린다. 마치 내가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거친 자갈길...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고 편하게 걸을 수가 없다. 당시 ‘위안부’ 소녀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이 공간은 마치 외부이지만 양쪽의 건물들로 인해 어둡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밑에선 거친 소리와 뚫린듯 하면서도 뚫리지 않는 이 공간이 무덤덤하게만 느껴진다.
고개를 둘러보니 왼쪽 벽면엔 소녀들이 고개를 숙인채 운명을 아직 모르는 듯 어디론가 향하는 것 같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아... 알 것 같다. 가지마라, 그곳에 가지마라...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을 때 빨리 도망가라. 집으로 가라. 내가 할 말은 못 되지만 부디 집으로 가서 가족의 따뜻한 품속에 있거라...
벽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바꿀 수가 없다. 이미 벽과 하나가 되어 고칠 수도 없다. 이 분들의 삶 또한 그러하리라. 이미 지나가 성노예와 할머니가 되어버린 삶이 하나가 되어 바꿀 수 없듯 말이다.
자갈길 사이로 오른쪽 벽면엔 양각으로 실제 할머니들의 석고가 있다. 자신의 뭣도 몰랐던 반대편 벽면 소녀시절에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하다. 아니면, 괘씸하고 죽어서도 갚지 못할 죄를 지은 나에게 뭐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벽면엔 배를 타고 고국을 떠나 일본이나 각 다른나라 위안소로 떠나는 소녀들의 그림이 있다. 소녀 시절 돌이킬 수 없는 그 곳을 할머니가 직접 그 때를 떠올려 그렸던 그림이라고 한다. 약 8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기억되고 있다는 것만 해도, 그분들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된다... 나는 그분들의 일생을 무책임하게 방관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잘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2-2. 눈 뜬 장님
이제 지하계단을 통해 내려간다. 암울하고 어두운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소녀들의 심정을 표현하려고 이 계단이 대신 말해주는 것일까. 이 곳엔 조명 하나 말고는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한 쪽 벽면엔 소리가 나지 않는 세계의 영상액자가 보인다. 모습은 바뀌고 그녀들이 무엇인가를 말은 하고 있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무 말 할 수 없었던 소녀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나는 눈 뜬 장님이다. 말하려고 하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상을 보면 나는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때를 주름 살이 가득한 할머니가되어도 너무나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조심히 발걸음을 옮겨 본다. 앞쪽으로 가보니 사람 한명도 올라가기 버거운 곳, 조그마한 개구부외에는 올라갈 수 없는 담담한 이 곳 가운데 신발 한 켤레가 영상을 향해 놓여져 있다. 5분만 있어도 답답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이 곳 왼쪽 벽면엔 젊었던 시절의 소녀들이 있고 오른쪽 벽면엔 이미 늙어버린 ‘위안부’ 할머니가 있다. 삶의 막바지에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벽면엔 위안소가 영상으로 보여주고, 신발 한 켤레가 그 곳을 향해 있다. 그녀들의 삶속에 위안소는 잊혀질 수 없는 곳이고 죽어서도 기억된다는 것을 신발이, 그리고 이공간이 대신 말해주는 듯 하다. 젊은 청춘을 보낸 시절이 이 공간 처럼 얼마나 답답하고 어둡고 무서웠을까...
2-3. 벽돌 한장과 빛
2층으로 이제 올라가보자. 계단실의 벽면은 이 곳을 리모델링하기 전 건물의 벽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거친 벽면에 할머니들의 글귀가 3개 언어로 벽돌 한장 한장에 적혀있다. 나와 같은 전범자에게 하는 말도 있고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게 앞으로의 여성들에게 하는 말 도 있다.
어두운 곳에 있다 와서 그런지, 이 곳은 굉장히 밝다. 위쪽엔 보이드를 통해서 한줄기의 빛이 들어 오고 있다. 계단을 따라, 글귀를 읽으면서 한칸한칸 올라가니 밝아지면서 글의 내용 또한 희망적으로 바뀌어 간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진실은 우리가 죽는다고 묻히는게 아닙니다. 진실은 반드시 알려집니다.”
그 글귀를 내가 읽으면서 비록 내가 지른 죄이지만, 이것을 단순히 ‘위안부’ 할머니 개인의 문제를 벗어나 앞으로 이런일 못지 않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사실 진실은 밝혀졌다. 내가 그곳에 있었으니, 그 문제는 위안부 할머니 못지 않게 나도 잘 알고 있다. 그 때의 나는, 우리나라 일본은 서양열강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문명국의 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는 인간적이고 선진국인 것 처럼 하기 위해선 나라에서 공식화한 위안소가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일본에서는 부인하고 은폐하려고 하는 것이다.
계단을 따라 나는 2층에 도착했다. 역사관이라는 이 곳에서는 그 당시 일어났던 사료들과 내용이 정리되어 있는 듯 하다. ‘돌격 1호’ 내가 전쟁에 참여했을 때 사용 했던 콘돔이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이름이 이럴 수 있겠다고 철없이 생각 했는데, 시간이 지나 지금와서 보니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이다. 아니, 부끄럽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도 과분하다. 이 콘돔을 통해 그 당시 소녀들이 겪었을 아픔을 생각한다면 부끄럽단 말은 나에게 있어서 사치다.
우리는 당시 그녀들을 ‘종군위안부’라고 불렀다. ‘종군'은 군대를 따라 다닌다라는 말이고, ‘위안부’는 ‘군인들에게 위안을 주는 자발적 매춘 여성’이라고 한다. ‘자발적’이라... 나는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온 줄 알았다. 알면서도 삶이 평탄치 못해 차라리 여기로 온 줄 알았다. 나라에서도 공식화 하여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은 온전한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였다. 그녀들이 실제로 적어 놓은 것을 보니 가장 큰 첫 번째의 이유는 일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동생들 공부시키고자 왔는데 위안소였다...라는 얘기가 가장 많았다. 두 번째로는 그냥 아무것도 모른채 끌려온 소녀들이였다.
거짓을 말하면서 까지 그녀들을 데려온 우리 정부는 정말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이라고 또 다른 거짓을 말했다는 것은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도 용서 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앞서 말했듯 ‘위안부’라는 말이 틀린 말이지만 우리정부의 공식화 했다는 증거로서 이 곳에선 ‘위안부'라는 글자에 따옴표를 안에 넣어서 사용하고 있다. 나와 같은 전범자의 피를 물려 받은 우리 후손과 자식들에게 최소한 이 정도는 내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위안부’의 문제도 그녀들의 용감함 없이는 이 문제의 심각성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족하고 죽어야 마땅한 나지만 일본에 돌아가서 그녀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아물게 해줄 순 없을까...
그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씩 일었다. 활짝 웃는 얼굴과 어디어디 출생... 또 옆에 누구, 어디어디 출생... 또 누구누구 어디어디 출생... 가만히 사진과 그녀들의 프로필만 읽었을 뿐인데, 가슴이 미워졌다. 경남 창원, 지역과 이름 이 세가지 만으로도 그녀들의 인권은 정말 존중받아야 마땅 했다. 이것은 태어나고 사랑 받았던 집이 있었다는 뜻이고 언제나 걱정해주며 따뜻한 밥을 해주었던 가족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왜 우리는 전쟁이라는 허수아비 같은 변명의 그늘아래, 그녀들의 한명 한명 소녀들의 삶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을까...
벽돌 사이의 빛, 그대들인가요.
후회해봤자 반성해봤자 이미 그녀들에게 상처를 남겼고 나 또한 용서 받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내가 이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우리나라 일본으로 돌아가 한명이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출발했는데... 무거워진 이 마음은 80년 넘게 평생 가졌을 할머니들에겐 새발의 피도 되지 않는다. 늦었지만 나는 발걸음을 옮겨 그녀들을 만나러 가보았다.
밖이 보일 듯 말 듯한 테라스로 나간다. 검은 벽돌이 지그재그로 쌓여있다. 영롱쌓기 라는 것인데 벽돌 하나하나에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사망날짜가 적혀있다. 벽돌 하나하나가 일종의 비석인 셈이다. 건물 전체는 검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 벽돌을 여기서 희생자 한명 한명의 작은 소망이 이러한 큰 공간을 만들어 낸것이 아닐까...
검은 벽돌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온다. 이미 검게 변한 이 벽돌을 이 빛이 바꿀 순 없지만, 최소한 가장 따뜻하고 그 때의 검게 변한 상처를 밝은 곳에서 보내리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것일까. 부디 다른 세상에선 따뜻하고 밝게 가라고 이곳에 모셔 놓은게 아닐까... 떨리는 손으로 장미 한송이를 이름 없는 벽돌에 꽂아 넣는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한명 한명 찾아가 씻을 수 없는 저의 죄를 용서 구해야 하는데, 이제 한 줌의 흙으로, 벽돌로 밖에 남아 있지 않군요. 한줌의 흙이 되는 건 매한가지인데 저는 거름에도 쓸 수 없겠소...
저의 죄를 용서 받기엔 너무 이기적이요. 용서는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것인데... 제 마음 편하자고 용서 구하기 보단 정말 당신이 원하는 용서를 드리고 싶습니다.
꽃 다운 나이 활짝 펼치기도 전에 씼을 수 없는 아픔을, 도대체 저 따위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소... 벽돌 사이 드리우는 빛이 저에게 꼭 말하는 것 같소.
그대들인가요...
부디 그곳에선 이곳에서 피우지 못한 꽃망울을 한 톨의 먼지 하나 없이 피우리라..."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 마당에 있는 소녀상을 조심히 바라보았다.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가 없다. 비스듬히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보았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렇게 있기를 오래 나는 하나밖에 없는 출입구를 통해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갔다.
들어 올때의 마음을, 이 곳을 나가서도 잊지 말라는 것일까...? 들어 올때와 달리 나갈 때의 철문은 너무 무거웠다.
3. 끝으로
짧은 글이지만 전범자의 입장에서 답사를 가고 정리했습니다. 겪어보지 못한 일을, 사전에 준비해간 자료조사와 공간적인 특징, 그리고 약간의 픽션을 섞어 이 공간을 풀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무래도 전범자였던 적이 없어서 조금 어색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의 감정이입과 제가 전범자여서 이곳을 어떻게 느낄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직 제대로된 사과조차 듣지 못해 하늘로간 피해자 할머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디 그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아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언어’입니다. 저는 그 공간의 언어를 전범자가 이곳에 왔으면 무엇으로 느꼈을까에서 해석하고 정리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