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건축적인 오브제로서 작품성이 뛰어나기 보단, 제가 이곳에 갔을 때 비워져 있는 공간으로 저의 감정을 채울 수 있음에 더 가치가 컸던 곳입니다. 행태적인 분석에만 Focus를 맞추려 했으나 그와 못지 않은 윤동주 시인의 숨결을 버무려 이 공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곳을 다녀오면서 느낀 것이, 채운다는것 이전에 비움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경험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여기서의 건축은 그저 거들 뿐 온전히 저희와 윤동주 시인의 교감으로 이곳을 풀어 갔습니다.
Location 서울 종로구 청운동 3-100
Since 1974, 2010
Architect 이소진(아뜰리에 리옹)
Structure 철근콘크리트, 철골보강
Area 건축면적(173.85 sqm), 대지면적(1,104 sqm)
1. 수도가압장과 윤동주
시인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투사도 아니였고 유명한 시인도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어느 투사 못지 않게 치열했습니다. <서시>에서 그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 하지 않고 그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의 치열한 바를 윤동주 문학관은 그를 어떻게 풀어갔을까요?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에서 문우 정병욱과 함께 하숙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윤동주는 종종 이곳으로 올라와 시정을 다듬곤 했었습니다. <별헤는 밤>, <자화상>등 지금까지도 사랑 받는 그의 대표작들을 이 시기에 썼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종로구는 버려져 있던 수도가압장을 문학관으로 개조하게 됩니다.
청운 수도가압장은 1974년 9월 청운 시민아파트 및 청운 단독주택지를 위해 수도가압장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이후 2009년, 청운 시민아파트가 철거되면서 가압장은 용도를 잃은 채 비워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시인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시절의 지리적인 인연도 있지만 이곳은 또 다른 공통점이 숨어 있습니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곳입니다. 세상사에 지쳐 타협하면서 비겁해지는 우리 영혼에, 윤동주시인의 시는 아름다운 자극을 줍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물결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들어줍니다.
2. 시를 읽듯, 공간 읽기
2-1.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버스에서 내려 창의문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등산하고 오신 중년 어르신들이 종종 눈에 띄입니다. 문학관을 향해 걷다 보니 앞쪽에 북악산이 보이고 인왕산 끝자락인 이곳에 문학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깨끗한 흰색, 주변을 생각했을 때 튀일 수 있는 색이지만 문학관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땅속에 묻힌 듯 하면서도 서울 도심지를 향해서는 열려 있습니다.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민족적이였던 윤동주 시인의 성격을 표현한 것일까요?
저는 다시 멀리서 부터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열려있는 창 쪽엔 윤동주 시인의 모습과 <새로운 길>의 시 한편이 타공패널로 열려있는 창 쪽에 반절가까이 차지합니다.
타공패널, 영롱쌓기 등의 특징은, 낮에 자연의 빛을 안으로 드리우고 밤엔 자신의 빛을 밖으로 향해 내뿜습니다. 도심지로 바라본 큰 창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 것 또한 윤동주 시인의 순수하고 부드러운 모습과 민족을 향한 마음만큼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제 계단을 따라 유리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2-2. 보이지 않는 것들로 채우다
이곳에 들어가서 보니, 윤동주 시인의 타공패널 사이 구멍으로 바깥이 보입니다. 마치 이곳에서의 밖을 보는 시선은 윤동주 시인을 통해 보라는 뜻인 걸까요? 저는 팜플렛을 하나 챙겨서 전시장을 차례차례 둘러봅니다. 공간을 둘러보니 전에 가압장으로써 기계실이 있던 자리라 그런지 천정이 높습니다. 높은 천정고와 윤동주 시인의 친필원고의 크기가 마치 대조를 이루는 듯 합니다. 그 이유는 윤동주 시인은 아시다시피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이 아니였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소극적인 성격도 아니였습니다. 단지 그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시’를 통해서 말을 했습니다.
시는 시집에 들어가야 하기에 크기가 건물에 비해 굉장히 작습니다. 하지만 이곳 가압장의 공간은 층고가 높기에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행위가 일어나는게 적합한 것이 통상적으로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대조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잠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듯 합니다. 오히려 다른 것들로 채우지 않았기에 그의 여운을 오롯이 제가 직접 느낄 수 있게 해주니 말이지요. 비운다는 것은 비우는 것에 의의를 두는것이 아니라 그 비움의 공간 속에서 각자의 생각을 갖게 해주는 것에 의의를 주는게 아닐까...라고 이곳에서 짧은 생각을 해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운좋게 도슨트 선생님의 설명도 같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도슨트 선생님의 열정적인 설명 덕에 아까 얘기했던 과하게 커보였던 이 공간은, 선생님의 설명과 저의 생각이 어우러진 무형의 것들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였습니다. 저는 ‘시인채’(제1전시실)의 설명을 들은 뒤 ‘열린우물’(제 2전시실)로 향했습니다.
2-3. 우물 속에 물이 없네
이 곳은 물탱크의 흔적이였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물탱크에 저장되어 있던 물의 흔적이 벽체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곳을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합니다. 왜 이 곳을 우물이라고 명명했을까요? 우물처럼 생기고 물이 있었던 곳이여서 우물이라 하기엔 조금 부족해 보였습니다. 저는 왜 그랬는지 곰곰히 거꾸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도대체 왜 우물이지? 물탱크였던 공간이라서? 너무 유치하지 않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순간, slope를 벗어나 중정가운데 서서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생각이 났습니다. 저희가 일반적으로 우물을 실제로 보게되면 하늘과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 지지 않습니까?(윤동주 시인또한 <자화상>에 그 표현을 넣었습니다.) 대신 ‘물'에 의해 반사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시 내용에서 ‘부끄러워 하는 한 사나이’가 우물속에 자꾸 비춰져 자꾸만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물에 의해 반사된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우물 속에서 위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시의 내용과 열린우물에서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공통점은 같으나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곳에선 '자기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워할 한 사나이'가 이곳에선 없다는 뜻입니다.
2-4. ‘열린우물이’ 주는 두 가지 메세지
마치 이 공간은 윤동주 시인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저희에게 주는 메세지 두가지가 있는 듯 합니다. 윤동주 시인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은 윤동주 시인이 전혀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충분히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많은 깨우침을 시를 통해 주셨다는 것, 적극적이지 않아도 시인은 본인의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저희를 사랑했다는 것, 그렇기에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게 첫번 째 메세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번째 저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우리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물을 보며 부끄러워 했던 시인에게서 과연 저희의 모습은 어떠한가... 반성하게 해줍니다. 오히려 얼굴을 비추어 주지 않음으로써 저희 각자 자신의 모습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까 시인채의 높은 천정고에서 주는 교훈처럼 말입니다.)
시인은 부끄러워했던 자기자신을 보며 3인칭으로 표현했는데, 이곳에 저희들은 우리 모습이 안보이는 우물 세상에서 한번이라도 부끄러워 했던 적이 있는가 반성하게 해줍니다. 이것이 열린우물이라는 공간에서 저희에게 주는 공간적인 두번 째 메세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난간이 없어 천천히 갈 수 밖에 없는 slope를 따라 이 곳을 만끽하며 걸어가 봅니다. 열린우물... 가만 보니 물대신, 다른 오브제로 채우는 대신, 윤동주 시인의 모습과 제생각과 감정들로 이 곳을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 지루할것만 같던 이 공간이 가장 큰 인상을 제게 주었습니다. 이 것이 공간이 주는 힘일까요... 이제 ‘닫힌우물’(제3전시실)을 향해 무거운 철문을 열어봅니다.
2-5. 빛의 대답
이 곳에선 아까와 달리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콘크리트로 사방이 둘러쌓여 있기에 사소한 저의 움직임 마저도 크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걸 사람들은 느끼는지 아까와 달리 발걸음을 조심하고 아이들의 손을 꽉잡은 어머니들도 보입니다. 이 곳은 윤동주 시인의 생을 마지막으로 보냈던 후쿠오카 형무소 처럼 폐쇄적입니다. 큰 장소에 아이들만 앉을 법한 대조적인 의자와 스툴은 이 공간의 공허함을 더욱 크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문이 닫히고 예전 사다리가 있던 개구부 쪽으로 한줄기의 빛이 벽을 반사해 들어옵니다. 빛은 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해야 할 것 같고 더욱 공허해 보이는 이곳에서 꼭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추측컨데 아까 열린우물 공간이 주는 두번째 메세지에서 저희는 부끄러워 했던 적이 있냐고 반성하게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그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듯한 공간인 듯 합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 시인이 의문의 주사를 맞고 생을 젊은 나이에 마감했는데, 이 한줄기의 빛은 불합리한 것에 대응 할 수 있는 날들이 더욱 많으니 용기를 가지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2-6. 중력과 윤동주시인
춥고 습하며 울림이 있는 이 곳에서 영상을 본 뒤, 다시 열린우물을 통해 걸어나갑니다. 들어올 땐 내리막이였습니다. 내리막은 어떠합니까? 중력의 법칙에 의해 이끌리듯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내려 올 수 있습니다. 전시실은 크게 3개로 윤동주시인의 생애와도 비슷한데, 마치 시인이 빠른 시간속에 일찍 생을 마감한 것 처럼 말입니다. 그는 다시 살아 올 순 없지만 저희는 그의 끝모습까지 제 3전시실을 통해 느끼고 왔습니다. 나가려면 이젠 오르막 길입니다. 그 오르막을 오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힘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앞으로 짊어져야 할 책임을 이 slope가 대신 말해주고 있는것은 아닐까요...
문을 나서고 ‘별뜨락’에서 ‘별헤는 밤’이라는 더치 커피를 마셨습니다. 보통 Museum에 Cafe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cafe 또한 Museum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제 3전시실의 빛의 구멍이 어딘지 둘러보고 시인의 언덕으로 향했습니다. 그 곳에서 윤동주 문학관을 보니 보일듯 안보일듯 땅속에 있는 모습에, 시인과 참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3. 끝으로
건축에 관한 경험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주가 되기에 이러한 감정과 건축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건축과 사람사이의 접점에 있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험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