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빠지는 우리 삶속에서 나의 속도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게 도와준 곳.
따라가야 할까? 뒤쳐지면 어떡하지? 전역하고 나날이 고민했던 질문.
하지만 이곳을 통해서 난 나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비교대상은 남이 아닌 어제의 나 자신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것이 내가 남해 돌창고를 선택한 이유이다.
Location 경남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1197-8
Since 1967
Structure 석조슬레이트
Area 건축면적(109m^2), 대지면적(226m^2)
Size 15000x7500x5300
1. 인연은 보이지 않는 힘
약 4년 전 대학교 1학년일 때 10살 차이 나는 형을 만났습니다.
옷은 좋은 것을 입고 음식은 건강한 것을 먹어야 한다고 누누히 말하던 형입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처음엔 같은 과 동기 한명이 기숙사에 살았는데, 기존 룸메이트와 트러블이 있어 다른방으로 이사하는 것을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룸메이트를 만났는데 그게 바로 승용이 형이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오랜 친구를 만나듯 반겨주었습니다. 형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허물없이 대해 주는 것에 묘한 자석이 끌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만나고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저는 겨울방학에 유럽으로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유럽에 가본적 없는 저로서는 한달 동안의 여행 일정에, 짐은 어떻게 싸고 무엇을 준비해야하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 때 형은 “멀면 멀수록 여행이 길면 길수록 짐을 줄여야만 가볍게 떠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속는 셈 치고 배낭 하나와 읽을 책 4권 그리고 아버지가 예전에 쓰셨던 필름카메라 하나만 챙겨서 떠났습니다.
떠난 후 저의 여행이 지쳐갈쯤 형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를 기점으로 관광명소 위주였던 저의 여행이 역사적이고 예술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 두오모가 각 도시마다 있으며 피렌체와 메디치는? 브루넬레스키와 얽힌 이야기 그리고 베니스... 지루할 것만 같던 여행 소재가 하나의 책을 읽는 것처럼 거리를 한 장 한 장 걷고 있었습니다.
단조로울 것만 같았던 저의 여행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준 여행을 끝으로 저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약 1년뒤 저는 군에서 일병에서 상병으로 진급할 즈음이였습니다. 승용이 형이 박사졸업을 뒤로 한채 재미있는 것을 해보고자 남해에서 살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쩌다 그런 선택을 하게되었고 왜 남해일까... 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보물을 담던 보물창고
1973년 남해대교가 준공되기 전까지 남해는 큰 섬이였습니다. 교통이 불편했던 터라 남해에 있던 각 마을은 비료와 양곡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가 필요했고, 그 창고는 농업협동조합 주관 아래 각 마을 요점에 건축되었습니다. 이 후 1967년 시문마을(구 살문마을)에 ‘시문창고’가 건축 되었습니다.
당시 시멘트를 구하기 어려웠던 환경이라 마을 사람들은 주변 산지에 있던 ‘청석’을 300x300x170mm 정도의 크기로 재단하여 하나씩 쌓아 올렸습니다. 창고의 문은 아치형태로 개구부를 뚫고 지붕은 목조 트러스와 슬레이트로 비바람을 막아주었습니다.
“형 학교를 뒤로한채 왜 이 곳으로 오게 되었어요?”
의아했던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곳은 남해대교가 개통되고 나서도 수십년간 마을 사람들의 비료와 양곡을 저장했던 보물 창고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통과 운송산업이 발전했고, 이 창고는 마을사람들에게 차차 잊혀지고 본래 창고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져 버렸습니다.
“이 창고는 그대로 있었을 뿐이야. 그리고 많은 마을사람들의 이야기가 ‘돌창고’를 통해서 얽혀 있지. 주변만 바뀌었어. 가만히 있던 돌창고 주변이 바뀌었는데, 내가 처음 보았을 땐 정말 우주선 같은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 같더라. 나는 이곳을 보면서 미쉘 푸코의 heterotopia가 떠 올랐어... 이 곳 ‘돌창고’를 통해서 소설적 공간, 현실적인 동시에 신화적인 공간, 과거의 공간인데 현재와 섞여있고 실재 공간이면서 실재하지 않는 공간을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더라. 그런 묘한 매력에 빠진 나는 그래서 내려오게 되었어...”
삭막하고 텅 비어있던 이 창고에 형은 어울리지 않는 듯한 화려한 샹들리에를 다는 것이 첫 일이였다.
3. 그릇을 채우는 방법
이 곳은 이제 어떠한 이야기를 담아야 할까요?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가진 창고에 담길 내용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앞서 말했듯 과거 이곳은 당시 소중했던 비료와 양곡을 저장해 주었던 ‘보물창고’였습니다. 제가 본 창고는 그릇입니다. 버려진 창고는 역사적 내용만 간직한체 텅 비어있었지만, 이 그릇에 형은 현재의 소중한 보물들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와 예술을 담아 보려고 합니다.
형은 도시생활을 뒤로 한채 시골에 내려오긴 했지만 정작 시골에 사려고 하니 신경써야 할게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돌창고와 함께 ‘돌창고프로젝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비해 시골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직업군이 다양하지 않고 젊은이들이 향유 할 수 있는 문화 인프라가 부족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돌창고 프로젝트는 시작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시골에서 문화 인프라를 구축해가면서 경제활동을 해보자!”
남해에서 문화와 예술을 통해 삶의 방법을 찾는다면 남해의 문화를 우리의 행위와 연결해야 합니다. 돌창고는 남해 마을 사람들의 가장 소중했던 것을 보관했던 견고하고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소중한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남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돌창고프로젝트 중>
3-1. 장르를 넘나드는 공간, 시문창고
돌창고는 (가로)x(세로)x(높이)가 15000x7500x5300mm의 공간입니다. 이 곳을 들어가보게 되면, 돌창고의 안쪽면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는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위쪽과 아래쪽 4개의 작은 개구부를 통해서만 빛이 들어옵니다. 심지어 그 개구부를 통해, 새로운 보금자리가 있을까 하고 찾아오는 제비의 문이자, 먹을 것이 있나 싶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들어온 고양이의 통로가 되는 곳입니다. 비가 오는 날에 이곳에 있으면, 개구부를 통해서 그리고 슬레이트 판을 치는 빗방울 소리가, 돌창고의 어둡고 삭막한 내부를 자연과의 협연으로 안을 가득 채웁니다.
돌창고프로젝트의 첫 프로젝트는 전시입니다. 첫 전시를 하게된 김정수 작가는 한달간 돌창고안에 작업하면서 남해에서 그리고 돌창고에서 느낀 감정들을 그림으로 표현 했습니다. 콩테와 오일페인트로 짙은 채도의 그림, 하나하나의 거친 선들과 차가운 느낌이 넓게는 하나의 따뜻한 감싸안음을 통해 마치 돌창고의 의미와 공간적인 특징을 그림으로 표현한것 같았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돌창고든 그림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하나의 오브제가 탄생하기까지 많은 스토리들이 얽혀 있고, 돌창고라는 공간이 다른 형태로도 적층적으로 의미가 쌓여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해 마을사람들의 요구로 인해 돌창고가 지어지고, 교통의 발달에 따라 그 의미를 잃어 갔으며, 버려져 있던 돌창고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에 의해 문화와 예술을 어울러서 다른 장르의 결과로 산출해낸 것입니다. 또 이러한 결과는 미래의 과정이 되기도 하며, 또 하나 이야깃거리의 한 줄이 될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건축 또한 하나의 결과로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나중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번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3-2. 애매함을 담는 공간 ‘애매하우스’
뜬금 없는 곳에서 전시를 하고, 젊은 이들이 살아가고자 한다는 말에 궁금했던 이웃 주민과 남해사람 그리고 주변도시에서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Museum의 여운은 Museum Cafe에서 만끽하고 간다는 승용이형은 돌창고 또한 Cafe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창고 안에서는 그러한 공간이 나오질 않자 추후 ‘애매하우스’라고 불리게된 앞쪽 건물에 Cafe를 열게되었습니다.
카페의 공간은 돌창고 못지 않은 곳입니다. 카페에 들어서기전 1층의 큰 문이 활짝 열리며, 들어오는 사람을 마치 반겨주는 것 같습니다. 큰 문과 높은 체적의 공간인 이곳은 이전에 (시골에 적지 않게 볼 수 있는 형태로 1층은 농기구와 기타 창고로 쓰고 2층은 주택입니다.) 창고로 쓰였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정면 주방 안쪽에 자개장이 한쪽 벽면으로 서있습니다. 손님은 음료를 주문할 때 창을 통해 바리스타와 자개장을 함께 봅니다. 제가 손님인 자리에 서있으면 마치 이 카페 또한 돌창고처럼 어울리지 않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특하게 미숫가루를 팔고 있군요. 창고였던 공간과 자개장 그리고 미숫가루... 시간이 지나 원목으로 된 나무테이블에서 미숫가루 한잔을 마시고 있으면, 이것 또한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목도 축였겠다 이 공간안에는 어떤 재밌는 요소가 있는지 둘러보기 시작합니다. 벽쪽에 굉장히 무거워 보이는 듯한 나무의자가 있습니다. 들어보니 이 나무 또한 다사 다난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아피통’ 나무로 필리핀과 같은 열대우림지에서 자라 선박의 한 부분이 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부숴져 떠밀려온 나무는 남해 인근 해안까지 흘러 남해 사람들의 배를 청소하기 위한 굄목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돌창고프로젝트를 함께하는 미공님은 이 나무를 의자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사소한 의자 또한 돌창고의 스토리와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3-3. 사이공간과 사람
시문돌창고와 애매하우스 사이에는 경운기가 들어가고 나가기에 불편함 없는 정도의 길이 있습니다. 이 사잇공간에서는 원래 마을 주민들이 쉬기도 하고 밭에 가는 어르신들의 통로가 되기도 하는 공간입니다. 독특한 골목과도 같은 공간인데 이 곳에서는 매월 둘째주 토요일 마다 플리마켓이 열립니다.
주변 남해사람들로 부터 해서 하동, 삼천포, 부산까지 각자의 소공예품을 가지고 돌창고의 매력에 이끌린 사람들이 이 공간에 모입니다. 그리고 그 것을 구경하러온 주민 어르신들과 관광객들도 하나 둘 씩 옵니다. 이웃집 아버님은 아직도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 신기해 하십니다.
“돌창고로 뭘 한다고 해서 부수고 다시 짓는 줄 알았으요... 근데 그걸 그대로 쓴다고 하더라케요. 뭐 코피숍도 생기고 장터까지 열어서, 버려져 있던 이곳을 활기차게 해주네”
그렇다. 돌창고라는 공간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쓴 유현준 건축가도 문화재라는 것이 단순히 박제시켜서 보게만 하는 우리나라를 비판했습니다.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도 기존의 요새를 궁으로 또 박물관으로, 오르세 미술관도 기차역에서 미술관으로 하드웨어의 변형은 최소화 한채 그릇의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돌창고 또한 하드웨어적인 변형은 최소화 한채 프로그램과 컨텐츠로 공간을 한결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업그레이드라는 말을 쓴 이유는 아무도 찾지 않던 이곳을 안과 주변의 골목을 통해 사람들이 채워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특별한 경험을 이곳에서 하고 추후에 또 다른 이야기의 한줄이 되기 때문입니다.
4. 끝으로... (보이지 않는 건축)
항상 건축이라 하면 외형적으로 모양은 어떠한지 재료나 구조는 어떤지, 조금 더 생각한다면 생활에 있어서 장단점이 어떤지만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창고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재작년 1년동안 남해에 살면서, 건축에 대해 편협한 사고방식과 시각을 지닌 저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이였습니다. 그릇의 본질은 결국 어떤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그 그릇은 어떠한 것을 채워야 비로소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채우지 않아도 우리는 그릇이라고 부르고 채우지 않은 그릇 또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보기만 하는 그릇은 과연 다시 그릇이라 부를수 있을까...? 그리고 그릇과 건축은 비슷한 부분이 꽤 많다고 느꼈습니다. 앞으로 저의 건축은 어떠해야 할까? 이 공간을 통해서 하나씩 고민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설계 수업을 들으면서 옆반 친구들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일단 만들고 말을 붙이면 돼.” 흔히 건축학과 학생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정말 말 뿐인 건축 밖에 되지 않습니다. 건축으로서 도면으로서 대화를 해야하는 차기 건축학도가 끼워넣기 식으로 말로 포장을 해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접근을 가지고 시도한 작품들은 결국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
저 또한 그런부분을 아예 배재한 접근만 한것은 아닙니다. 1학년 때엔 만들고 나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그 자리에서 소설쓰듯 만들어 낸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뭔가 맞지 않고 어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유럽여행을 했을 때 느꼈던 것 처럼 아는 만큼만 보입니다. 제가 돌창고에 얽힌 스토리를 모른채 보았을 땐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돌창고와 얽힌 스토리를 듣고, 창고를 다시 보았을 땐 뭔가가 달라 보였습니다. 이 부분 또한 돌창고는 가만히 있는데 보는 제가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의 건축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건축만을 통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은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주변의 것을 절충한 허브 공간으로서의 언어라는 것을요. 그러려면 주변의 특징과 나의 컨셉 그리고 말하려고 하는 바를 뿌리 깊숙히 부터 꺼내야 합니다. 그래야 말 뿐이지 않고 하나의 책을 보는 듯한, 혹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하나하나씩 줄기가 되고 가지 부터 잎사귀까지 한 그루의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무는 주변을 이해시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저의 건축 또한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