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혼자 그리고 황무지에서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살고 있지 않다. 인간생활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어야 한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고, 인터넷이 보급되어 산골지역이라도 대부분의 정보와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방과 도시의 지역 불균형과 도심화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사람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모이고 있다. 그렇게 각자 살기 위해 모인 곳 ‘도시’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이 거주하고 생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물리적인 터전’이 필요하다. 그 ‘물리적인 터전’은 대부분 건축물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에서 건축물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느 나라를 가던 ‘도시’라는 곳에서 사진을 찍어 보아라. 그 사진 속에는 사람들의 모습, 흐릿하게 구름 낀 하늘, 바쁘게 지나가는 자동차 그리고 건축물 등이 있다. 건축물이 없고 사람들과 하늘 그리고 자동차만 있다고 상상해 보면 과연 도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반면에 사람과 자동차가 없고 건축물만 있다고 상상해보면 쓸쓸하거나 폐허가 된 도시라고 불릴 수 있다. ’스카이라인’이라는 말이 나온 것처럼 건축물은 이제 도시의 이미지와 분위기를 규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우주에 영원한 것은 없어서, 평생 그 자리에만 있을 것 같은 도시 속 건축물은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기도 한다. 홍익대학교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과 같아서 그곳에 사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고 진화하고 쇠퇴하기도 한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건축물에서 신축, 증개축, 폐기 등)는 독단적일 수가 없어서 사회적 약속, 특히 법규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건축사는 왜 건축법규를 알아야 하는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에 건축물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건축물은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 법규라는 틀 안에서 지어진다. 혹자는 “건축은 법규가 만드는 것이다”라고 할 만큼 건축에 있어서 법규는 Regulation이다. 말 그대로 규제라는 뜻인데, 쉽게 말해 “해라”하는 것보다 “하지 마라”하는 게 더 많다는 뜻이다. 이 법규에는 어떤 최소의 기준에서부터 최대의 기준이 있는데 설계는 그 테두리 안에서 Optimizing 즉, 최적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사가 설계를 하는 데에 앞서 건축법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2. 건축물 입장에서의 건생(生)은 다 지어지고 시작된다.
건축기본법 제1조(목적)에서 “이 법은 건축에 관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와 국민의 책무를 정하고 건축정책의 수립 · 시행 등을 규정하여 건축문화를 진흥함으로써 국민의 건전한 삶의 영위와 복리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키워드는 ‘건축문화를 진흥함으로써’라는 말인데, 건축이라는 게 단순히 짓고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이후로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그 안에서 사람들의 생활이 영위되기 때문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힌다는 것이다. 실제로 건축물 입장에서의 생(生)은 다 지어지고 나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실제 일반 사람들에게 의해 쓰이는 것은 이때부터다.
나는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아직 부족한 학생이다. 내가 느낀 것과 다른 경우도 있지만 실제 지어진 몇몇의 건축물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면 건축가가 어떤 책임의식으로 임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크게 건축의 프로세스에서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Clinet’, 그 프로젝트를 받아 수행하는 ‘Architect’ 혹은 ‘Designer' 그리고 실제 그 공간을 이용할 ‘User’가 있다. 프로젝트마다 다르지만 대개 지어지는 데까지 몇 년, 지어지고 사용되며 허물어지기까지 몇 십 년임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바로 ‘User’이다. 다들 알고는 있지만 쉽게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건축사는 이 부분을 이 부분을 간과해선 안된다. 이들은 형언적인 것에서 시작해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인 형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들의 노력과 업무는 건축물이 다지어지기까지‘만’ 힘이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User의 입장에서 어떻게 사용될지, 머릿속에서부터 자료조사, 모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생각하지만 대개 ‘현실과 타협’이라는 큰 까닭으로 그 들의 윤리적인 책임이 흐릿해지고 있다. 몰라서 하지 않는 게 아니고 알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다.
3.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건축은 지어진다.
제2조(기본이념)에서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구현함···(중략), 생활공간 조성, 경제활동의 토대, 역사를 반영하고 미래세대에 계승될 문화공간의 창조 및 조성”이라고 되어 있다.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구현한다는 것은 음악 예술 등에 비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구현함에 있어, “최근 학계에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공간 복지 실현 및 공공건축 조성 정책 방안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건축이 곧 복지라는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건축의 공공적 가치는 문화생활에 있어 다른 어떤 요소보다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복지라는 정책의 수단으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이 말은 즉 건축이 다른 어떤 재화 못지않게 일반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창동 · 상계동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 ‘통영 폐조선소 도시재생 아이디어 공모’, ‘남해 미조 (구) 냉동창고 재생 설계공모’ 등, 실제로 쉽게 우리 주변에서 건축을 통한 복지, 삶의 질 향상, 더 나아가 하나의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터전으로 조성하고자 하고 있다. 이전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여 건축물을 짓기 보다 이제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건축사들은 무형적인 가치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파악과 그것을 반영한 설계가 그들의 직업윤리와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4. 앞으로 요구될 건축사의 직업윤리는?
건축사법 제18조(자격등록 및 갱신등록) 2항에서 “제1항에 따른 등록을 신청한 사람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건축사 윤리선언을 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간호사의 나이팅게일 선서처럼 건축사들 또한 약 10년 전부터 윤리선언을 해왔다.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는 건축설계는 물론, 삶의 질 향상과 더불어 이제 환경문제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다.
복잡하고 다변화되는 시대 속에, 앞으로 건축사의 직업윤리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고 해서 정작 중요한 부분에 들어갈 정성이 흐릿해져서야 되겠는가? 약 20여 년 전에 “인간의 생활을 쾌적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건축의 본래 존재 목적이라면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창작행위를 하는 사람이 바로 건축가이기 때문이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한다. 두 번이나 바뀐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 파라메트릭디자인 등 기술 복합적인 것을 언급하기 이전에 정말 사용자와 일반 사람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며 ‘편안한 건축’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해왔는가? 오히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생기는 지체 현상으로 사람들의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3D 프린터로 모형을 만들고 있는 친구 옆에서 칼질하고 있으면 애처로운 눈빛은 충분히 감내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생활을 더 다이내믹하게 해주었고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건축사의 직업윤리에 대해 기술에 대한 딱딱함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Mainstream은 말랑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힘이 있어서, 인터넷이 보급되어 사람들은 집안에서 세계여행을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더 움직이게 했다. 사람은 직접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윤리적인 책임을 얘기할 때, 보다 주관적인 평가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수만 공감했던 주관적인 평가가 객관화될 수 있게, 건축가 못지않게 일반 사람들도 같이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한다. 그에 있어 건축가는 ‘그들만의 리그’ 혹은 ‘엘리트 예술’ 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앞으로 요구될 건축가의 윤리적 책임이다.